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란시스코 피사로 (문단 편집) === 황제 아타우알파와 마주치다. === 1532년 5월에 피사로는 툼베스로 돌아간 뒤 이 곳에서 몇 개월을 보내다가 잉카 제국의 중심부까지 들어가보기로 결정했다. 2개월 정도의 긴 여정을 통해 [[안데스 산맥]]을 넘어 카하마르카 부근에 다다를 수 있었고, 바로 근처에 잉카 황제([[사파 잉카]])인 [[아타우알파]]가 대군을 이끌고 도달해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. 기록과 이후 행적으로 볼 때, 피사로의 원래 계획은 잉카 황제의 신변을 확보한 뒤 충돌을 최소화하면서 잉카 제국을 접수하는 것이었던 듯하다. 즉, [[에르난 코르테스]]의 케이스에서 좋은 부분(황제 신병 인수 뒤 이용)만 취하고 나쁜 부분([[슬픔의 밤]])은 버릴 심산이었다는 것이다. 그런데 뜬금없이 황제 본인이 대군을 이끌고 접근 중이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. 당시 아타우알파는 형제인 [[우아스카르]]와의 대규모 내전에서 승리한 직후로, 수도 [[쿠스코]]를 향해 승리의 행군을 하던 참이었다. 포로가 된 우아스카르는 라마 오줌을 받아 마시며 두 발로 직접 걸어서 안데스 산맥을 넘어가던 중이었기 때문에,[* 잉카 제국은 험한 산지가 많았기 때문에, 황제가 자기 발로 걷지 않고 가마를 타고 다닌다는 것이 매우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. 애초에 특정 부족에서만 가마꾼을 뽑을 정도였으니. 때문에 황족이자 전대 황제였던 우아스카르가 자기 발로 직접 걷는다는 것은, 엄청나게 치욕적인 일이었다.] 우아스카르의 속도에 맞춘 아타우알파의 행렬의 속도는 매우 느렸다고 한다. 혹설에 의하면, 아타우알파가 카하마르카에 온 첫 번째 목적은 온천욕이었다고도 한다. 때마침 푸냐에서 발생한 불쾌한 사건[* 사실 푸냐는 잉카 제국의 변방으로 제국에 대한 소속감이 낮았다. 이후 아타우알파의 대처를 볼 때, 그는 푸냐인들이 수천 명가량 전사한 사실은 까맣게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. 족장 몇 명이 끌려가서 죽고, 부족민이 끌려가서 괴롭힘을 당했다더라라는 정도로 알고 있었을 확률이 높다.]에 관한 소식을 들은 아타우알파는 이 사건의 주범인 기묘한 이방인들이 근방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보려고 했다. 이렇게 되어 1532년 11월 5일, [[에르난도 데 소토]]가 사자로 파견되어 스페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잉카 황제를 접견했다. 이때 아타우알파는 쿨하고 시크한 태도를 보였지만, 속으로는 난생 처음 본 [[말(동물)|말]]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전해진다. 소토가 황제 쪽으로 말을 돌진시킨 뒤 급정지하는 기마술을 선보였을 때, 아타우알파는 쿨하게도 털끝 하나 움직이지 않았으나, 아타우알파의 친위대원들이 순간 겁을 먹고 뒷걸음질쳤다고 한다. 소토가 떠난 뒤 '''[[친위대]] 전원은 목이 잘렸다.''' 하지만 이런 인상 깊은 사건까지 겪고도, 스페인인들을 깔본 아타우알파는 '''[[단 한 번의 실수 때문에 개고생|특별한 호위 병력 없이 다음 날 직접 찾아가보기로 했다.]]''' 한편, 예상치도 못하게 황제의 대군과 마주친 데다가 그가 직접 찾아온다는 소식을 들은 피사로 원정대는 잔뜩 겁에 질려 뜬눈으로 밤을 샜다. 잉카 군대는 수만 명은 되어 보이는데[* 실제 아타우알파를 직접 수행한 인원은 약 3,000~8,000명 가량으로, 대부분 비무장이거나 경무장이었다고 한다. 다만, 그리 멀지 않은 곳에 10,000명 단위의 전투부대가 존재했다고 한다.], 자기들은 겨우 168명[* 보병 106, 기병 62. 단, [[핸드 캐논]]도 10문 있었다.]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